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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고기를 싫어하는 사람들
닭고기를 싫어하는 사람들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10.05 09:2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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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71)

나는 한겨레 신문사의 신지민 기자를 좋아한다. 그를 만난 적이 없으니 당연히 얼굴을 모르고 그가 쓴 신문 기사 한 편 제대로 읽은 적이 없으니 기자로서의 성실성이나 전문 분야 같은 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 우연히 보게 된 그의 짤막한 에세이 한 편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싫어하는 음식’이라는 주제로 수십 명이 저자로 참여하여 만든 옴니버스 형식의 책에서 우리의 신기자는 놀랍게도 ‘닭’이란 제목 아래, 자신은 치킨을 포함하여 닭으로 만든 모든 요리를 싫어한다고 ‘커밍아웃’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3년간 회식 때마다 치킨 한 조각 먹지 않고 지냈는데, 더 놀라운 건 아무도 내가 치킨을 먹지 않는다는 걸 몰랐다는 거다. 치킨은 그런 음식이다.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상상도 못하는, 눈앞에 있으면 서로 먹느라 바빠 다른 사람이 계속 사이드 메뉴만 집어 먹는지 어쩌는지도 모를 그런 음식.”
  
그의 글에 절절히 묘사된 것처럼, 이른바 ‘국민 간식’으로 자리 잡은 치킨의 위세에 눌려, 남들 마음 불편하게 할세라 본인의 솔직한 기호(嗜好)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 못 하고 그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정신승리’와 함께 억지 화합을 도모했을 우리의 신기자. 그 모습을 상상하는 순간, 난 우악스러운 이 땅의 ‘닭 포식자들’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마이너리티의 처지가 서글퍼 눈물이 핑 돌 뻔했다. 복날 몸보신하러 삼계탕 먹으러 가자는 직원들의 성화가 못마땅하면서도 결국엔 슬며시 함께 따라나서고, “이 골프장 그늘집의 치맥이 기가 막히게 맛있어”라는 친구들의 호들갑에 ‘그냥 멸치나 조금 달라고 할 것이지’란 말을 오늘도 기어이 삼키고 마는 내 모습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신기자의 글을 보면서 이역만리의 이민족들 사이에서 혈혈단신 힘들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고국에서 온 동포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시골에서 올라오신 할머니와 어린 시절 한집에 살면서 할머니가 가끔 닭을 잡아 배를 가르는 모습을 종종 봤던 게 내가 닭을 징그럽게 생각하게 된 계기였을지 모르겠다. 아울러 그 시절 ‘영양센터’라 쓰인 동네 가게 한쪽 유리창에 털 뽑히고 모가지 없는 닭들이 일렬로 꼬챙이에 끼워져 돌아가고 있는 기괴한 장면이 어린아이에겐 트라우마였을 수도 있다. 아무튼 난 치킨이 싫고, 삼계탕이 전혀 당기지 않으며, 백숙도 닭죽도 잘 못 먹고, 샐러드에 들어간 닭가슴살도 다 골라낸다. 한 마디로 모든 종류의 닭고기가 다 싫다.
  
몇 년 전 페이스북에는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커뮤니티가 생겼는데 순식간에 회원 수가 근 1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회원 숫자가 그리 많다 보니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 제법 알려졌고 이들의 ‘선언문’도 주목을 받았다. 냉면을 주문할 때 ‘오이 빼주세요’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세상, 오이 걱정 없이 맘 놓고 편의점 샌드위치를 살 수 있는 세상, 학교 급식에 오이가 나와 고통받는 청소년과 어린이가 더는 없는 세상 등등을 원한다는 그들의 비장한 선언문 말이다. 그들은 이제 당당하게 말한다. 힘을 모아 세상에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알리자고. 확실한 규모가 파악되진 않았으나 이참에 닭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대동단결하여 우리의 존재를 세상에 외칠 때가 온 것 같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오이나 닭 이야기를 단순히 음식 취향이 좀 별난 사람들의 괴팍한 투정쯤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이런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고 ‘왕따’시키지 않으려는 자세야말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건강한 ‘다양성(diversity)’을 확보하는 첫걸음 아니겠는가. 관점, 통찰, 경험, 사고방식 등이 다른 것을 ‘인지 다양성(cognitive diversity)’라 한다. 성별, 인종, 나이, 종교 같은 차이를 ‘인구통계학적 다양성’이라 일컫는 것과는 조금 구분되는 개념이다. 이런 ‘인지 다양성’이야말로 조직과 사회에 꼭 필요한 경쟁력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정치경제철학부를 수석 졸업한 언론인이자 저술가인 ‘매슈 사이드(Mathew Syed)’의 최신작 <다이버시티 파워>에서는 집단지성의 원천이 되는 ‘다양성의 힘’을 수많은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놀랍게도 그는 영국 탁구 국가대표를 지낸 탁구 고수였는데 영국 축구가 위기에 빠졌을 때 축구협회 기술자문위원회 멤버로 합류했었다. 그는 자신 말고도 럭비팀 감독, 사이클 코치, 첨단 스타트업 창업자 등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그 위원회에 함께 하면서 얼마나 많은 창의적 아이디어를 냈는지 이야기한다. 그건 축구 전문가들만 모아놓았다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들이었다. 
  
9.11 테러의 주역 오사마 빈 라덴이 처음 언론에 등장했을 때 미국 CIA는 허름한 옷을 입고 동굴 속에서 모닥불을 쬐던 그를 그리 위협적인 인물로 보지 않았다고 한다. 거의 모두가 백인이며 개신교도로 구성된 당시 CIA의 엘리트 관료들에겐 오사마 빈 라덴의 그런 모습이 이슬람 전통에서 볼 때 거룩한 선지자의 상징이었다는 것을 알아챌 능력이 없었다. 매슈 사이드는 ‘다양성을 포기해야 탁월함이 확보된다’라는 착각이 CIA 내에 만연했기에 이슬람에 정통한 직원 하나 채용하기가 쉽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뛰어난 개인들이 집단적 오류에 빠져 재앙을 초래했다고 일갈한다.
  
올해 우리 병원 노사협상 막바지에 있었던 일이다. 코로나 상황이 끝나가니 고생한 전 직원에게 뭐라도 보상을 해달라고 노조가 요구했고 사측은 재정 부담을 호소하며 난색을 표했었다. 실랑이가 한창이었을 때 사측 위원인 우리 행정부장이 느닷없이 즉흥 제안을 했다. 전 직원들에게 치킨을 한 박스씩 선물하는 게 어떻겠냐는 거였다. 아아... 그 자리에서 난 목놓아 외치고 싶었다. 세상에는 치킨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전 직원이 죄다 치킨을 좋아할 거란 획일화된 생각이 다양성을 억압하여 회사 발전을 저해할 것임을 왜 모르느냐고. 부디 노사 할 것 없이 닭고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인식해주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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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고기싫어하는 한사람 2023-05-20 16:47:32
정말 반갑습니다, 저도 닭고기 진짜 싫어하는데 언론에서는 마치 닭고기는 그 누구도 싫어하지 않는다는 거처럼 포장해서 말하다보니 매번 사람들과 어울릴때마다 닭못먹는다는 이야기를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게 괴로웠습니다...
누구나 잘 안맞는 음식이 있는건데 오이 싫어하는 이유, 콩 싫어하는 이유는 그리 핑계를 대면서 왜 닭 싫어한다는건 이상한 사람 취급받아야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병원장님이 한 목소리 내주셔서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인정인정 2022-10-10 20:34:38
님의 글에 공감합니다. 저는 삼겹살을 싫어하는데요. 삼겹살이 싫다는 말을 함으로 인해 주목을 받는 게 싫어서 그냥 적당히 따라가서 상추와 깻잎을 들고 먹는 척합니다. 닭 싫어하는 취향, 파이팅입니다^^